趣味 生活,/궁궐.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MARS. 2025. 5. 19. 20:45

2025년 4월 26일 (토) 촬영

화령전은 지금은 화성 행궁의 정문을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지만, 본래는 화령전은 행궁과 별도의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화령전의 외삼문입니다. 화령전이란 편액을 걸었네요.

수원 화령전(水原 華寧殿) / 사적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 즉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이안청, 복도각,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을 갖추고 내삼문과 외삼문까지 구비하였다.

화령전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약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일부 공간은 복원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에 49세 나이로 승하하였다. 정조의 무덤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릉원 가까이에 조성하기로 결정하자

당시 나라 일을 보던 정순왕후는 현릉원 재실에 모시고 있던 정조 어진을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별도로 어진을 봉안할 전각을 짓도록 명령했다.

이 명에 따라 순조 1년인 1801년 4월 29일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완성하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는 1804년에 처음으로 화성에 내려와서 현륭원과 건릉에서 제사를 지내고, 화령전에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를 봉행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총 10차례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지낸 순조를 본받아 헌종, 철종, 고종도 화성에 내려올 때마다 작헌례를 봉행하였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중심이 되어 5일마다 어진과 화령전 건물을 살폈으며 매년 정조 탄신일과 납일에는 제사를 지냈다.

화령전은 정조 이후의 모든 왕들이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 높다. - 현지 설명문 내용 -

* 납일 - 동지가 지난 뒤 세 번째 미일(未日)로 조상이나 종묘 또는 사직에 제사 지내는 날

화령전의 전각 배치도.

화령전의 외삼문을 지나면,

내삼문이 나오고,

내삼문을 통과해야.

정전인 운한각이 나옵니다.

정전(운한각) / 1801년(순조 1) 창건, 1966년 수리, 보물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건물이다.

중앙에는 정조 어진을 모신 합자(閤子)를 두고, 좌우에 있는 익실에는 정조가 편찬한 책과 제사에 쓰는 물품을 보관했다.

보통 어진을 모시는 공간은 화려하게 치장하지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소박하게 만들고,

학문을 좋아하던 왕을 기리기 위해 익실에 서책을 보관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다른 영전에서는 보기 어렵다. 합자와 익실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하여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했다. 고종 9년(1872)에 운한각 바닥을 마루로 개조하였지만 아궁이 흔적이 남아 있다.

순조는 1804년에 처음 화령전에 와서 작헌례를 올렸다. 이때 건물 이름을 운한각이라 짓고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써서 내렸다.

운한은 많은 서적을 탐구한 학자를 지칭하는 '운한소회'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정조를 상징하는 말로도 종종 쓰였다.

현재 운한각에 봉안되어 있는 어진은 2004년에 다시 그린 표준영정이다.

원래 모셔져 있던 정조 어진은 1908년에 서울로 옮겨졌으나 1954년 부산 피난처에서 소실되고 말았다. - 현지 설명문 -

* 어진 - 임금의 초상화

* 작헌례 - 임금이 몸소 왕릉, 영전, 종묘, 문묘 등에 참배하고 잔을 올리던 제례

일제강점기 운한각

운한각으로 오르는 계단의 소맷돌입니다. 좌측의 소맷돌은 새로 만들었네요.

운한각의 오른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재실입니다.

운한각 월대에 향로와 드무가 있습니다.

순조가 직접 써서 내렸다는 운한각의 편액.

정조의 어진.

운한각 월대에서 본 내삼문.

운한각의 좌측면, 뒤에 보이는 건물은 향대청과 전사청이 있는 건물입니다.

복도각과 이안청입니다.

운한각의 뒤편입니다.

뒤편의 벽은 전돌로 쌓았습니다.

이안청으로 가는 복도각입니다.

운한각의 뒷동산.

이안청, 복도각 / 보물, 1801년(순조 1) 창건, 1966년 수리

이안청은 어진을 임시로 보관하는 건물이다.

정전인 운한각을 수리하거나 변고가 생겼을 때 어진과 서책 등 기물을 옮겨 보관하기 위해 이안청을 만들었다.

복도각은 정전과 이안청을 잇는 행각이다. 정전 곁에 이안청을 두는 것은 어진을 모시는 영전 건축물에서 일반적이지만

정전과 이안청을 복도각으로 연결한 방식은 화령전에서만 볼 수 있다.

화령전은 조선 시대 영전 건축물에서 복도각이 적용된 최초의 사례이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례다.

* 영전 - 임금의 초상을 모신 전각

복도각의 끝, 우측 벽이 이안청의 벽입니다.

복도각 끝 지점의 연등 전장이 아름답게 보이네요.

복도각에서 보이는 운한각.

이안청의 문.

이안청의 우측

이안청은 지면에 붙여 짓지 않았습니다.

운한각 지붕 내림마루에는 잡상이 7개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안청의 우측면과 뒤편의 모습.

재실의 출입문입니다. 작은 문이지만 기와 위를 양성바름으로 처리해 건물의 격을 높였습니다.

문의 기둥에도 조각을 한 판자를 대어 격을 높였습니다.

재실에서 운한각까지 왕이 행차할 경우를 대비해 어로와 판위를 마련해 둔 왕의 길도 있습니다.

재실 / 1801년(순조 1) 창건

재실은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이 머물며 준비하는 건물이다. 국왕이 직접 제사를 지낼 때면 어재실로 쓰였다.

재실에서 정전 앞까지 임금이 지나가는 길인 어로와 잠시 대기하는 장소인 판위가 설치되어 있다.

1908년에 정조 어진을 서울로 옮긴 뒤 비어 있는 화령전 건물을 수원의 풍화당(風化堂) 어른들에게 관리하도록 했는데,

그 이후로 재실을 풍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풍화당은 일종의 기로소로 지금의 경로당과 유사한 친목 기구이다.

* 어재실(御齋室) - 임금이 능이나 묘에 나들이할 때 잠시 머물던 집.

풍화당에서 본 정문,

풍화당에서 본 운한각과 이안청.

정문과 측면에 있는 일각문.

일각문과 담장.

정문으로 와서.

재실을 나섰습니다.

어로와 판위가 있는 운한각 앞을 지나서,

향대청과 전사청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전사청 우측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어정이라고 합니다.

어정(御井) / 1801년(순조 1) 창건, 2005년 복원

어정은 화령전 제사에 사용하는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로 깊이는 약 5.4m이다.

일반적으로 왕실 사당에는 별도로 우물을 만들어서 정결한 물을 사용했다.

화령전 어정은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형태로 물이 흘러넘치는 통로까지도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다.

1908년 정조 어진을 서울로 옮긴 후 화령전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사라졌다. 2000년에 시행된 발굴 조사를 통해 2005년에 어정을 복원했다.

어정에서 물이 넘치면 마당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물길도 만들었다.

흘러내린 물은 이곳에 머물렀다가, 개천으로 나갔다.

향대청과 전사청이 있던 건물.

향대청, 전사청

향대청은 제사에 사용하는 향을 보관하는 건물이고,

전사청은 제례에 올릴 그릇이나 깔개 등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고 준비하는 건물이다.

전면에 두 개의 출입문이 있다. 넓은 문은 향문(香門)으로 향대청에 보관한 향을 정전으로 가져갈 때 쓰고,

좁은 문은 전사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오가는 출입문으로 썼다. 1999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건물 터를 확인하고 2005년에 복원했다.

향대청의 좌측에 있는 일각문.

화령전 밖, 낙남헌 옆에 있는 산에 살고 있는 꽃복숭아.

뒤에 보이는 건물이 낙남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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